南松 李寅鎬(法大12)
나는 경남 함양의 송평(松坪)이라고 하는 200호쯤 되는 농촌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라났다.
이 마을은 작지만 서원이 있고, 서당이 있고, 해방이 되기까지 반상(班常)의 구분이 있는 비교적 보수성이 강한 마을이었다.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우리 마을에서는 개인적으로 접할 때는 일상 택호(宅號)나 자(字)나 호(號)를 썼고, 이런 환경에서 자라난 나는 서로 ‘자(字)’나 ‘호(號)’를 부르는 것이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해왔으며 그래서 1958년 군대생활을 할 때 이미 ‘호’를 갖고 있었다.
1996년에 우리 87동창회(12회)가 환갑(環甲)기념문집을 만들면서 “동창회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라는 설문조사에 “우리 동기생들이 ‘호’ 지어 부르기” 라고 적어낸 일이 있는데, 이것은 ‘호’에 대한 평소의 내 생각의 일단을 표현한 것이다.
옛날 우리나라나 중국에서는 부모가 자식을, 스승이 제자를 부르는 이외에는 함부로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심지어 친구간에도 이름보다는 ‘자’나 ‘호’를 불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람의 이름을 공경하여 이를 함부로 부르지 않는 것이 양반사회에 풍속화 되었고, 이에 따라 ‘자’나 ‘호’를 갖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간 문화와 문명이 급속도로 발전함에 따라 사회의 제반상황 현상도 크게 변화 발전되었지만 ‘호’에 대한 풍습이 사회 지도층에서 널리 계승 이용되고 있는 현실에서 학식과 덕망이 높은 옛날의 선비, 군자 같은 위상을 갖고 있는 우리 동기들이 ‘자’나 ‘호’를 갖고 쓰는 것은 또한 당연한 것이다.
자(字)는 이름에서 불어난 것으로, 남자가 장가든 후에 이름 대신 부르는 것, 곧 버금 이름이라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이름과 관계 있는 글자로 지어 호칭으로 썼다.
그 일례로 공자의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로, 니(尼)자는 비구니(比丘尼) 또는 니구(尼丘)를 뜻하므로 구(丘)를 보완해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제갈 양의 ‘자’ 공명(公明)의 경우도 밝을양(亮) 자와 밝을명(明) 자는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
예기(禮記) 곡례(曲禮) 상편에 보면 「名子者, 不以國, 不以日月, 不以隱疾, 不以山川, 南女異長 男子二十, 冠而字, 父前子名, 君前臣名 女子許嫁개而字」 라고 하여 남자가 스무 살이 되면 관례(冠禮)를 올리고 난 다음 ‘호’를 썼고, 여자도 약혼한 뒤에는 ‘자’를 썼음을 알 수 있다.
예기 교특생편(郊特牲篇)에는 또 「冠而字之, 敬其名也」 라고 하여 ‘자’를 쓰는 근거를 기록하고 있다.[※개자는 비녀라는 뜻으로, 죽(竹) 밑에 개(開)의 속 글자를 합한 글자]
호(號)는 이름이나 ‘자’ 외에 허물없이 쓰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말하자면 일종의 별명(別名), 별호(別號), 당호(堂號)인 셈이다. 그래서 그 사람의 성격이나 특징, 기호(嗜好), 주거지, 관직 등을 사용해서 친구나 스승이 지어주는 것이 통상적인 예이며 가끔은 ‘호’는 이름이나 ‘자’ 외에 허물없이 쓰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말하자면 일종 스스로 짓는 경우도 있다. 이것이 자호(自號)다.
'호’는 자신이 최종적으로 택하고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의 취향이나 기호가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또 ‘호’에는 아호(雅號), 시호(諡號)가 있다. 아호란 예술가들이 시문(詩文)이나 서화 등에 쓰는 본명 외의 풍아(風雅)한 호나 별호를 뜻하며, 시호란 옛날 제왕, 재상, 유현(儒賢)들이 죽은 뒤에 그들 생전의 공덕을 칭송하여 임금이 추증(追贈)하는 별도의 호(號), 호칭(呼稱)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 한 사람이 두 개 이상 여러 개의 ‘호’를 갖는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둘 만하다.
역대 명사(名士) 5,369명의 ‘호’가 실려있는 한국고사대전(金舜東 저)에 따르면 ‘호’에 쓰여진 한자는 전부 1,225자이고, 가장 많이 쓰인 글자는 재(齋), 당(堂), 암(庵), 곡(谷), 계(溪), 헌(軒), 송(松)이며 ‘호’ 가운데 가장 많이 쓰는 것이 송암(松庵)이고 송파(松坡), 송재(松齋), 송암(松巖), 송정(松亭), 송계(松溪) 등도 많다.
선비들이 ‘호’에 즐겨 쓴 나무 이름에서도 송(松)이 으뜸이고, 다음으로 매(梅), 오(梧), 풍(楓), 백(栢), 류(柳), 행(杏), 율(栗) 등이다.
방위(方位)를 따져 지은 것에는 東이 많고, 西, 南에 이어 北자도 있다.
우뚝 솟았거나 높은 곳을 나타내는 글자로는 산(山), 봉(峰)이 단연 많고 파(坡), 애(厓), 고(皐), 대(臺), 강(崗), 오(塢), 능(陵), 악(嶽), 록(麓) 등이 있다.
기상에 관한 글자로는 운(雲)이 많고, 설(雪), 하(霞), 우(雨)와 제(霽)가 쓰였다. 물에 관한 글자로는 계(溪)가 월등히 많고 천(川), 주(洲), 담(潭), 강(江), 포(浦), 간(澗) 등 자연환경을 따서 지어서 철학이나 사상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이번에 캠페인을 통하여 밝혀진 우리 동기들의 ‘호’를 대충 훑어보아도 이와 같은 경향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어떤 학자는 길흉을 따져서 ‘호’를 택할 것을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몇 개 글자를 제시하고 예를 들기도 하나 그것은 객관적으로 신빙(信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무엇보다도 ‘호’는 자신의 이미지를 상징적으로 집약해서 나타내면서도 부르기 쉽고 듣기 좋은 것이면 좋다.
‘호’를 지어서 부르면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상호간에 쓰는 언사(言辭)를 한층 격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절친한 친구간에 스스럼없이 불러대는 어릴 때부터 입에 익은 “너”, “당신”이라는 말도 “자네”라는 단어로 바꾸어 쓰지 않으면 안되며,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보다는 “이렇게 하게”, “저렇게 하는 것이 좋겠네”라고 하는 식으로 말을 순화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또 ‘호’를 지은 다음에는 서로 자주 부르도록 유도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확산책의 하나로, 친구와의 대화에서 친구의 ‘호’를 함께 자기의 ‘호’를 스스로 사용할 것을 권하고 싶다.
예를 들어 친구에게 전화를 걸 때 “나 南松입니다. 碧山 계십니까?” 하면 전화를 받은 가족도 그의 남편, 아버지의 ‘호’가 碧山인 것을 알게 될 것이고, 또 당사자인 碧山도 그 이후에는 나를 호칭할 때 반드시 南松이라고 호칭하게 될 것이다.
반대로 자신이 이름만을 쓴다면 남들이 그 사람의 ‘호’를 쓰는데 주저하게 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출발한 뒤 우리 동기들의 여러 모임에서 가급적으로 ‘호’를 부르게 된다면 머지않아 ‘호(號)’ 부르기 풍토가 뿌리를 내리게 될 것이다.
우리들은 이미 황혼기인 望八의 나이에 접어들었다. 친구간 친지간 지인 간은 물론이고 일반 사회인들에게까지도 순화된 점잖은 말을 쓰고, 또 쓰는 것을 보여주어야 할 세대인 것을 마음에 새기고 이 캠페인을 활성화할 것을 제안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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